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경 별궁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>'''이 해 중 남경(南京)에 신궁(新宮)을 창건했다.''' >---- > - [[고려사]] 문종 세가 재위 22년, [[1068년]] 중. 남경 별궁 최초의 기록. [[문종(고려)|문종]]이 고려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키며 동시에 임금이 거주할만한 새 궁궐을 짓는데 이 궁이 바로 남경 별궁이다. 하지만 얼마 안가 남경은 폐지된다. 이후 시간이 지나 [[숙종(고려)|숙종]]이 재위 4년, 1099년에 다시 남경 설치와 궁궐 증축을 논의한다. >'''남경궁궐(南京宮闕)을 완성했다.''' >---- >고려사 숙종 세가 재위 9년, [[1104년]] 5월 중. 남경 별궁 증축. 1104년 숙종은 드디어 다시 남경을 재설치했다. 숙종은 재위동안 여진을 없애 북방을 수복하려는 노력을 계속 시도했는데 남경 재설치를 [[윤관]], 오연총 등 북방에 나가는 신하들에게 시켜 그들의 입지를 크게 다져 주었다. 궁궐을 증축하는 것은 늘 신하의 반대를 불렀다. 숙종 대의 풍수지리 연구자인 김위제(金謂磾)는 나말여초의 승려 [[도선]]의 책을 인용해 남경 천도의 풍수지리적 이점을 강조했다. >도선기(道詵記)가 이르길: '고려(高麗)의 땅엔 삼경(三京)이 있어 송악(松嶽)이 중경(中京), 목멱양(木覓壤)[* '목멱산의 땅'이란 뜻으로 목멱산은 지금의 서울 남산이다.]이 남경(南京), 평양(平壤)이 서경(西京)이다. >(임금이) 11, 12, 정, 2월은 중경에 있고 3, 4, 5, 6월은 남경에 있고 7, 8, 9, 10월엔 서경에 있으면 36개 나라가 조천(朝天)해올 것이다.'[* 이 문구는 [[묘청]]이 나중에 그대로 써먹는다.] > >도선기가 또 이르길: '나라가 세워지고 160여년 뒤, 목멱양(木覓壤)에 도읍할 것이다.' >---- >도선의 답산가(踏山歌)가 이르길: '송성(松城)이 낙후되면 어디로 갈까, 해가 뜨는 곳에 평양(平壤)[* 서경 평양이 아니고 남경 남평양. 고구려 때의 지명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.]이 있다. 후대현사(後代賢士)들이 우물을 파니, 한강어룡(漢江魚龍)들이 사해(四海)[* 천하의 다른말.]에서 몰려온다.[* 답산가는 엄연히 정확하게 예언했다. '''조선왕조가 남평양에 도읍했으니.'''] >---- >삼각산 명당기(三角山 明堂記)가 이르길: '임자년(壬子年)에 땅을 개척하면, 정사(丁巳)년에 성자(聖子)를 얻는다. 그러니 [[삼각산]](三角山)에 제경(帝京)을 만들면, 사해(四海)가 조(朝)[* 조천의 줄임말.]한다.' >---- > - 고려사 방기 열전 김위제 중. 남경 천도 시도자는 모두 도선기를 한번씩은 인용했다. 조선왕조는 김위제를 방기[* 특출난 재주이지만 좀 의심스러운 기술을 가진 자.] 열전에 넣어 비난했고, 당시에도 꽤나 반대가 있었다.[* 태자 예종이 서경에 [[용덕궁]]을 지을 때도 오연총이 크게 반대했다.] 하지만 북벌 담당자 밀어주기, 왕권 강화를 위해 숙종은 남경개창도감(南京開創都監)을 설치해 끝까지 추진했다.[* 이는 예종도 마찬가지다. 용덕궁은 결국 지었고, 이로인해 서경파 관료들의 힘이 세져 예종이 원했던 대로 개경파 관료들과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.] 숙종의 태자 [[예종(고려)|예종]]은 어머니 [[명의태후]]와 함께 남경에 행차했다. 사찰을 방문하고, 연회를 열고 백성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. 고종은 여몽전쟁 도중 남경 별궁에 자신의 곤룡포를 안치해둔 적이 있다. 이는 도참설에 따른 신하의 제안을 수용한 것이다. >"[[송악산|부소산(扶踈山)]]에서 왼쪽 산맥으로 간 곳을 [[아사달]](阿思達)[* 특이하게 아사달이 개성을 중심으로 좌측에 있는 서울 부근에 있다고 한다.]이라 하니 옛 양주(楊州)[* 남경으로 승격되기 전 지명이 양주이다.]의 땅입니다. 이 곳에 궁궐을 만들어 거주하시면 국조가 800년을 더 이어갈 수 있습니다." >---- > - 고려사 고종 세가 재위 21년(1234년) 7월 中. [[공민왕]], [[우왕]], [[공양왕]]은 이미 폐허가 되버린 개경[* 몽골이 부숴버린 [[만월대]]를 원종이 재건축, 충선왕이 증축했다. 당시 [[연경궁]]은 총 410여칸으로 전성기 때보다 한참 축소되어 있었다. 근데 그나마도 홍건적의 침입으로 또 부숴져서 수창궁으로 옮겨 간 상태였다.]을 떠나고자 했다. 개경보다 더 엉망이 된 서경[* 나성에 황성까지 있던 [[장락궁]]은 제 2정궁 취급을 받았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그야말로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.]은 제외되었고, 남경의 궁궐을 다시 수축해 천도를 시도하였으나, 세 명 모두 실패한다. 만약 천도가 성공했다면 고려의 법궁은 [[태봉국 철원성]], [[만월대|개경 본궐]], [[고려궁지|강화경 본궐]], [[연경궁]], [[수창궁]]에 이어 남경 별궁이 되었을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